내 오랜 대학 후배이자 절친인 혜란이의 집 현관문을 열면, 일단 심호흡부터 해야 한다. 거실 벽면을 빈틈없이 채운 거대한 책장들과 그 앞에 탑처럼 쌓인 책들, 그리고 나름의 카테고리별로 꽉꽉 채워진 수납상자들이 가득하다. 책들의 영토 속에서 혜란이는 간신히 자기 몸 하나 누일 공간을 사수하며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는 그녀를 보며 게을러서 그렇다거나 미니멀 라이프 좀 배우라고 잔소리를 하겠지만, 대학 시절부터 곁에서 지켜본 내 생각은 좀 다르다. 혜란이는 게으른 게 아니라, 활자로 된 세상 모든 지식과 감정의 가치를 너무 높게 평가하는 지독한 '독서광이자 수집광'일 뿐이다.
언젠가 한번은 작정을 하고 선배 노릇 좀 하겠다며 혜란이의 집을 습격한 적이 있었다. 벽을 채운 책들은 백번 양보한다 쳐도, 바닥 한 구석에 쌓아둔 오래된 신문지 더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신문지를 묶어 들자, 혜란이가 마치 국경을 수호하는 경비병처럼 내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눈빛은 거의 블록버스터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선배, 안 돼! 거기 내가 스크랩해둔 칼럼이랑 세상의 역사가 다 들어있단 말이야. 버리면 내 지적 자산이 날아간다고!”
그때 깨달았다. 혜란이에게 물건을 비우는 일은 잡동사니들을 버리는 게 아니라, 자기 인생의 소중한 페이지를 찢어버리는 거대한 사건이라는 것을. 대학 시절 낙서가 가득한 전공 서적, 심지어 중고등학교 때 교과서와 참고서, 문제집까지, 거기에다 다 해진 과잠바와 절대 버리지 못하는 수많은 책까지. 그 모든 것들은 혜란이가 지나온 날들을 기억해 주는 든든한 증거들이었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니까, 변하지 않고 늘 그 자리에 있어 주는 활자들에게 나름의 의리를 지키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가끔 보물상자 같은 수납함과 책들이 너무 빽빽하게 줄지어 있어서, 분명 이 상자 어딘가에 넣어둔 옛날 사진 앨범을 찾느라 한참 보물찾기를 할 때면 헛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뭐 어떤가. 상실이 두려워서, 혹은 그 시절이 그리워서 손에 쥔 작은 것 하나도 쉽게 놓지 못하는 그 마음이 조금 귀엽게 보이기도 한다. 물건을 차곡차곡 꽉 쥐고 있는 만큼, 사람에 대한 인정도 깊은 녀석이니까.
요즘도 혜란이의 집에 놀러 가면 우리는 여전히 책과 수납상자 사이에 옹기종기 끼어 앉아 수다를 냅다 떤다. 이제는 무작정 버리라는 잔소리 대신, 혜란이의 수집욕을 디지털로 전환해 보려는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는 중이다.
“네가 모은 이 귀한 칼럼이랑 서평들, 그냥 종이로 두기엔 너무 아깝잖아. 블로그나 홈페이지 하나 만들어서 데이터로 싹 이전해 봐. 그게 진짜 요즘 지성인들의 아카이빙이야!”
혜란이가 눈을 반짝이며 또 새 책을 장바구니에 담으려 할 때마다 슬쩍 태블릿을 들이미는 것도 내 전략 중 하나다. “혜란아, 요즘 전자책 진짜 잘 나와. 눈도 안 아파.” 혹은 “이 책은 그냥 도서관에서 빌려봐. 정 없으면 내 거를 봐. 돈 모아서 수납장 많은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든지, 옆집 벽을 뚫어서 확장을 하든지!” 하며 내 책을 강제로 쥐여주기도 한다.
이렇게 멍석을 깔아주면 혜란이는 "어? 그것도 일리가 있네..." 하며 솔깃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는 신나서 상자를 열고 물건에 얽힌 무용담을 보따리 풀듯 쏟아낸다. 한바탕 웃고 떠들고 나면, 신기하게도 혜란이가 먼저 "음, 이건 블로그에 정리하고 종이는 이제 진짜 보내줄 때가 됐군" 하며 낡은 신문 몇 장을 분리수거함에 툭 던져 넣기도 한다.
집을 비워내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그래도 상관없다. 책장 사이에 파묻힌 후배 녀석의 이야기가 다 떨어질 때까지, 나는 내 책을 기꺼이 빌려주고, 전자책 링크를 보내며, 언제까지고 그녀의 유쾌한 보물 자랑을 들어줄 생각이다. 방 한구석, 그녀의 지독한 활자 사랑이 아늑한 디지털 아카이브로 변할 그날을 기다리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