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잃은 유명 작가가 있었다. 그는 38년간 아내가 만든 주먹밥과 녹차를 먹으며 원고를 고쳤다. 주먹밥은 늘 시간에 쫓기던 그를 위한 아내의 배려였다. 장례식이 끝나고 식욕마저 사라졌던 작가에게 허기가 찾아왔다. 오전 10시, 아내가 주먹밥과 녹차를 내주던 시간이었다. 그는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고, 찬장의 찻잔을 챙겼다. 하지만 아내가 어떻게 주먹밥을 만들었는지, 녹차를 우렸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멍하게 서 있던 그는 아침 식사를 건넨 후, 수고하라는 듯 늘 자신의 어깨를 두 번 두들기던 아내의 손을 떠올렸다. 햇살과 함께 스미던 따스한 손의 감촉이, 그 한결같은 응원의 목소리 말이다.
담담했던 한 남자가 무너졌다. 그는 마치 어린애처럼 소리 내 울었다. 사랑은 이토록 사소하지만, 결코 사소할 수 없는 많은 것으로 이루어진 탓에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은 언제, 어디서 또 길을 잃을지 알 수 없다.
슬픔을 말할 때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연극 리어왕의 한 장면이었다. 숨이 끊긴 딸 코델리아를 안고 무대를 천천히 걷는 백발의 리어왕. 이때 슬픔은 ‘축 늘어진 무거움’으로 압축되는데 셰익스피어는 슬픔을 상징이 아닌 실체로 묘사한다. 연구에 따르면 슬픔은 실체적인 통증을 수반한다. 살이 찢어지고, 팔이 데거나, 심장이 찔리는 슬픔이란 표현이 과장이 아닌 것이다. ‘애가 탄다’의 ‘애’는 창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애타는 슬픔’이란 몸이 타는 듯한 슬픔의 고통을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친구에게 조앤 디디온의 ‘상실’의 한 구절을 읽어주었다. “나는 나머지 신발들을 처분할 수가 없었다. 그가 돌아오면 신발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사랑하는 이의 물건을 치우지 못했다. 이별에서 슬픔을 제거해버리는 마법은 없다. 울음이 멈출 때까지, 기억이 희미해질 때까지 애도하며 작별하는 것만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상처는 아물어도, 흉터는 남는다. 쉽게 처분할 수 없는 그의 오래된 신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