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가장 분노하는 것은 무엇일까.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 무색하게 범죄 자체보다 자신의 행위에 책임지지 않는 뻔뻔함에 더 분노한다.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 때 대중의 분노를 일으킨 건 천문학적 손실의 책임자 중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심 탈레브는 ‘스킨 인더 게임’에서 이 점을 지적하며 평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그는 “사회 하층부의 사람들을 위로 조금 끌어올리는 것만으로 동적 평등을 만들어낼 수 없으며 소득과 재산에서 상위 1퍼센트의 부자가 계속 바뀌는 사회가 역동적이고 평등한 사회”라고 규정한다. 누구든 자신이 내린 판단의 결과가 자신의 안전에 영향을 미치는 ‘리스크’가 존재하는 사회가 지금보다 더 평등한 사회라는 것이다. 임기 내에 어떻게든 자기 성과를 과장하고 책임은 뒤로 미루는 정치인과 관료, 경영자들이 득세하는 사회에서 평등은 빛을 잃는다. 권한과 책임이 동시에 작동하는 방식만이 시스템의 부패를 막기 때문이다.
다시 선거의 계절이다. 세상에 사람이 세 부류 ‘기버(giver), 테이커(taker), 매처(matcher)’가 있다고 말한 사람은 ‘애덤 그랜트’다. 정치인은 철저히 기버 성향인 사람이 해야 한다. 테이커들은 머슴이 되겠다고 나서지만 결국 권력이 된다. 현실 정치에는 테이커가 더 많다. 테이커는 상대가 권력자일 경우 ‘기버’로 위장해 좋은 첫인상을 남기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위로나 충고를 가장한 ‘조종’에도 능하다.
큰 권력은 큰 책임을 요구한다. 하지만 우리는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의 ‘내로남불’에 지쳤다. 탈레브 말처럼 문제를 잘 ‘이해’하는 사람보다 잘 ‘설명’하는 사람이 넘쳐나는 이 불길함은 대체 언제 멈출 수 있을까. 고대 그리스의 현자들은 ‘진실’의 반대를 ‘거짓’ 아닌 ‘망각’이라 말했다. 왜 그랬을까? 진실을 은폐하고 거짓을 말하는 자가 원하는 게 오직 망각이기 때문이다.